매일의 묵상(룻기 1장 19-22절)
Author
somang_pastor
Date
2025-01-07 21:43
Views
132
2025년 1월 8일
마라가 아닌 나오미로 살기
룻기 1장 19-22절(새번역)
19 그 두 사람은 길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니, 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아낙네들이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 하고 말하였다.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21 나는 가득 찬 채로 이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22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여인인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는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품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우리에게 성장과 회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며 살아가는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읍 내에서 유력한 가문이었던 엘리멜렉 가족이 먼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다는 사실도 한때 이 마을에서 큰 화젯거리였을 것입니다(2절). 그런데 어언 10년이 지난 후, 낯선 여인과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등장은 작은 성읍 베들레헴을 소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며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반가움과 놀라움만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이방 여인인 며느리만을 데리고 빈손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처량한 모습을 보고 느낀 연민이 담긴 탄성이었습니다. 이는 10여 년 전 고향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나오미의 모습과 처지를 반영한 말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의 연민을 거절하며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20절). '나오미'는 ‘감미로운 자’, ‘은혜로운 자’, ‘사랑스러운 자’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마라’는 ‘괴로움’, ‘쓰라림’, ‘쓴맛’을 뜻합니다(출애굽기 15:23).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한 것은 그녀가 모압에서 겪은 극심한 슬픔과 고통 때문이며, 지금도 비참하고 괴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가득 찬 채로 이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21절). 여기서 나오미가 특별히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부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전능자’(샤다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순종할 때 무한히 축복하시고, 반대로 어그러진 길로 갈 때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떠난 나오미가 경험한 것은 풍족함이 아니라 궁핍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맛보는 것은 마라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우리는 은혜와 사랑 안에 풍성히 거하는 나오미와 같지만, 하나님을 떠난 자는 괴로움과 쓰라림, 즉 마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하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풍성히 경험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기도*
주님, 주님을 떠나 마라의 인생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안에 은혜와 평강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길 원합니다. 아멘.
마라가 아닌 나오미로 살기
룻기 1장 19-22절(새번역)
19 그 두 사람은 길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니, 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아낙네들이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 하고 말하였다.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21 나는 가득 찬 채로 이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22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여인인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는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품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우리에게 성장과 회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며 살아가는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읍 내에서 유력한 가문이었던 엘리멜렉 가족이 먼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다는 사실도 한때 이 마을에서 큰 화젯거리였을 것입니다(2절). 그런데 어언 10년이 지난 후, 낯선 여인과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등장은 작은 성읍 베들레헴을 소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며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반가움과 놀라움만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이방 여인인 며느리만을 데리고 빈손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처량한 모습을 보고 느낀 연민이 담긴 탄성이었습니다. 이는 10여 년 전 고향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나오미의 모습과 처지를 반영한 말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의 연민을 거절하며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20절). '나오미'는 ‘감미로운 자’, ‘은혜로운 자’, ‘사랑스러운 자’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마라’는 ‘괴로움’, ‘쓰라림’, ‘쓴맛’을 뜻합니다(출애굽기 15:23).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한 것은 그녀가 모압에서 겪은 극심한 슬픔과 고통 때문이며, 지금도 비참하고 괴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가득 찬 채로 이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21절). 여기서 나오미가 특별히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부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전능자’(샤다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순종할 때 무한히 축복하시고, 반대로 어그러진 길로 갈 때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떠난 나오미가 경험한 것은 풍족함이 아니라 궁핍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맛보는 것은 마라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우리는 은혜와 사랑 안에 풍성히 거하는 나오미와 같지만, 하나님을 떠난 자는 괴로움과 쓰라림, 즉 마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하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풍성히 경험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기도*
주님, 주님을 떠나 마라의 인생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안에 은혜와 평강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길 원합니다. 아멘.